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동로 사건 (문단 편집) === 접수 준비와 접수 단행 === 한편 소련은 1929년 6월 6일, 중국정부가 국제법을 무시했기 때문에 소련 주재 중국 민관에 대해 국제법의 구속을 받지 않을 것이라며 항의했고 이에 장쉐량은 사태가 긴박하면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병력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면서 이를 국민정부 외교부장 [[왕정팅]]에게 알려 준비를 철저히 하게 했다. 같은날인 6월 6일, 장쉐량은 장징후이에 여영환에게 대내적으로 엄밀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것과 대외적으로 소련이 중동로의 협정정신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게 했다. 그리고 소련이 지연작전을 쓰면 지공회의 해산, 소련이 설치한 상호의 폐쇄, 전신 검사, 거민 제한, 불량분자 구축을 시행하라고 지시하며 혹시 모를 소련의 군사적 대응에 대비했다. 장쉐량은 7월 6일, 톈진에 도착하여 기자간담회를 개최 "최근 왕정팅의 전보를 접하였는데, 외교 문제를 함께 구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중동로 문제를 논했고 7월 7일, 베이핑에서 3월 26일에 일어난 [[1차 장계전쟁]]과 5월 23일에 일어난 [[1차 장풍전쟁]]을 갓 진압한 장제스와 회동하였다. 두 사람이 실제로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중동로 회수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며 철도매수, 대소절교, 살령(撒領) 등 외교적인 부분은 중앙의 외교부가 담당하고 중앙이 주소양을 소련에 파견하여 협상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장제스는 외교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외교부장 왕정팅을 급히 베이핑으로 소환, 7월 10일 3자회담을 가졌다. 자세한 것은 회담 내용이 비밀에 붙혀져서 알 수 없으나 이후 장쉐량의 언행을 볼 시에 국민정부가 장쉐량의 조치에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7월 4일부터 이사회 소집을 통한 소련과의 접촉은 소득이 없어 여영환은 7월 10일 오전 6시, 동북 전정 감독 장빈(張斌)을 시켜 철도전용 전화를 제외한 모든 전화를 회수하고 오후에 직업조합, 철도위원회, 국영무역부, 직물조합, 석유조합을 폐쇄하고 공산당원의 가택수사 및 검거에 들어가 하얼빈에서 33명, 중동로 연선에서 26명을 체포하였고 그 중 31명을 가재도구를 챙길 틈도 주지 않고 오후 6시 35분 하얼빈발 열차를 통해 소련으로 추방했다. 7월 11일 중동로 독판 겸 중동철도 이사장 여영환이 소련인 철도관리국장 엠샤노프를 파면하고 중국인 부국장 범기채를 대리국장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특구 행정장 [[장징후이]]가 소련 극동 무역국, 상선국, 상업 연합회 등 상업기관 과 소련인 종업원 조합의 해산을 명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